인간 관찰기

원망도 예언이다 (1)

생각하는 마일로 2019. 11. 20. 16:02

Photo by  Marcelo Leal  on  Unsplash

 

고작 몇 년 사이 G 본인과 그녀의 주변에는 불상사가 자주 있었다. 아버지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고 큰 병이 아니지만 본인도 두 번이나 입원했으며 그밖에 자잘한 불운들이 따랐다. 

 

그러다 G가 대형 사고를 냈다. G가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고 우연히 그 카톡 메시지를 본 친구의 시댁이 거품을 물게 된 상황이었다. G가 악의가 있었다거나 고의가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히 G가 보낸 한 개의 카톡 메시지가 친구 시댁 집안에 엄청난 노여움을 샀으며 G의 친구는 이혼 변호사와 상담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건 여담인데 여러분 카톡 메시지는 잠금해제 시에만 볼 수 있게 설정합시다. 잠금화면에 메시지가 그대로 보여서 큰 곤란 겪는 사람 여럿 봤습니다. 잠금해제 없이 뜨는 사적인 메시지는 사람 여럿 잡습디다.

 

G는 크고 작은 불운이 닥칠 때마다 교회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재수가 없다며 나와 내가 소개해준 교회 친구 탓을 했다. 처음 한두 번은은 지가 힘들어서 그려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불운이 반복되고 G의 메시지 파장이 너무 커지자 꽤 폭력적인 언사로 나와 내 친구 만난 다음에 나쁜 일이 났다며 헛소리를 해댔다. 사실 확률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외생활이라 수동적인 G에게는 나와 교회 친구들 말고는 딱히 많은 인간관계가 없었으니 확률적으로 불운들이 닥쳐올 때 나와 교회 친구들을 만난 직후 혹은 한두 주 후 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G를 다른 모임에 초대하고 싶어도 영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인교회 모임 위주로 밖에 초대할 수 없었다. 석불상 사진에 소원을 적어놓은 G의 휴대폰 배경화면이야 본인 취향이려니 존중해주는 개인주의자인 나에게 이런 미신적인 원망은 참으로 불합리하게 생각되었다.

 

Photo by  Céline Haeberly  on  Unsplash

 

G의 원망은 확실히 예언이 된 것 같다

 

그녀는 소소한 불운이 닥칠때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재수 없다."는 말을 계속 해댔다. 이러한 말이 본인 스스로에게는 마음의 짐을 더는 위안의 말이었을 수도 있겠다.

문제는 몇만년의 걸쳐 인류가 밝혀낸 우주의 원리 중의 하나가 G 개인의 인생에 작동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시크릿"처럼 확언은 현실이 된다는 최신 신비주의적 서적들이나 "말이 씨가 된다"는 오랜 격언이나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28) 같은 성경 구절들을 일일이 들이대지 않아도 말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우주의 원리든 신이든 우리의 말의 조건문보다는 말의 내용 자체 위주로 처리하는 것 같다. 우주의 프로세스가 우리의 사고가 처리되는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우주가 접수한 G의 자기 예언은 아래와 같다. 

 

[원문]  "교회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재수 없다."

 

[접수된 예언 1] "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만난다." 

[접수된 예언 2] "나는 재수가 없다."

[접수된 예언 3] "교회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확실히 재수가 없다."

 

그녀의 자기 예언대로라면 그녀는 어쩐지 교회 다니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평소에 재수가 없으며 그래서 안 좋은 일들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 기억에 그녀와 가족의 잦은 입원이라든지 집안의 우환 더 나아가 친구에게 손해를 끼치는 상황이라든지 크고 작은 불행이 연속극처럼 펼쳐졌고 그녀는 그러한 상황을 "탓"이라는 키워드에 계속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G는 왜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나?

 

G의 심리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안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이 중심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렸다. 

 

존재 불안이 원망으로 가는 심리과정을 기술하자면 아래와 같다.

 

"내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

"이는 내가 무언가를 잘 못했기 때문이거나 내가 벌 받을 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살 수가 없다." 

"이 불운과 불행의 원인이 다른 사람이라면 나는 이 존재적 불안을 회피할 수 있다."

"또한 불행의 원인으로 지목한 타자에게 우월한 지위를 행사하며 존재 불안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타자로 지목되는 대상은 보통 상대적 약자이다.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러한 미신적인 프로세스는 심리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폭력의 행사야 말로 이 불행의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내가 속하지 않았다는 확증인 동시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미신을 진리로 변화시키는 기적의 제례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심리의 싸이클을 이해한다면 사실 G가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은 본질적으로 G 자신이다.

 

우리 전통문화 속에서 자주 듣던 말 중에 하나는 "며느리를 잘못들이면 집안이 망한다."아니던가.

잘 생각해보면 집안에서 가장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없고 희생을 강요당한 존재가 전통사회에서 며느리 아닌가? 보통 전통적인 집안의 의사결정권은 이른바 으른들 혹은 가부장들에게 있고 흥망은 대체로 의사결정권자들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 아닌가? 예를 들어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은 아들과 사업자금을 털어준 부모님들 같은 경우 말이다. 그러나 집안이 잘 되었을 때는 내 아들이 잘난 것이고 잘 못됐을 때만 힘없는 며느리를 괴롭히던 기적의 삼단논법이 완성돼 온 곳이 대한민국인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집안이 망한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탓이다. "

" 가장 권력이 없고 가장 남에 가까운 사람이 며느리 혹은 아내이다. 비난에 따른 반대급부가 적다."

" 그러므로 집안이 망한것은 며느리 탓이다. "

 

차라리 조상 탓을 해라. 저승에 계신 조상은 가슴에 상처를 덜 받는다.

 

 

 

=== 다음 글에서는 원망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분석이 이루어 집니다.  ===